사는 이야기

글벗이 남긴 수필집

자갈 길. 2015. 10. 16. 00:16

 

 

2015. 10. 13. 화요일

수필창작 수업을 서둘러 마친 우리 서리풀 문학회 회원들은 차에 올랐다.

1시간을 조금 더 달려 도착한 곳은 남양주시 진겁읍의 한 산골짜기에 있는 사찰.

봉인사라는 절에는 먼저 도착한 조지은씨의 가족과 친정 식구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필창작 수업의 지도교수이신 신길우 문학박사님과 서리풀 문학회 회원들이 정성을 다해

故 조지은님의 유고를 퇴고하고 편집해서 발간한 수필집을 영정에 헌정키로 한 날이었다.

그런데 이날은 공교롭게도 그녀가 가신지 꼭 101일째 되는 날이었다.

 

조지은씨는 나보다 6개월 먼저 수필창작공부를 시작한 선배였다.

같이 공부한 2년 동안 얼마나 열심이든지….

그녀는 글쓰는 재주가 없음은 말할 것도 없고, 편지 한 장을 제대로 써 본 적이 없을 만큼

글쓰기를 멀리하며 살았단다. 하지만 주기 전에 책을 한 권 내고 싶어 글을 배우러 왔단다.

매주의 수업시간에 회원 작품에 대해 합평을 하는 동료들의 이야기도 초기의 그녀는 글솜씨뿐 아니라

토씨의 사용, 띄어쓰기 등 문법까지 우려할 수준이어서 듣기가 민망할 정도의 혹평을 들었단다. 

내가 보기에도 수필은 한참 멀었다 싶었다. 수시로 지적을 하곤 했다.

우리 수필반에는 3개월마다 신입 회원들이 들어온다.

그러나 선배 동료들의 지적과 합평에 마음이 상해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않았다.

하지만 조지은씨는 그 심한 혹평에도 포기는 고사하고 한 주도 빠지지 않고 글을 써 냈다.

다른 사람들은 한 달에 한두 작품 써 내기도 버거워하는데….

 

언제부턴가 그녀의 작품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제법 수필의 형식을 갖추기 시작하고, 문법도 틀리는 곳이 별로 없어졌다.

그녀는 동료의 지적과 혹평을 회초리로 받아들였단다. 

심지어 중학생들이 다니는 학원에서 국문법을 공부했단다.

하긴 그녀는 수필뿐 아니라 매사에 보통 열정이 아니었다.

수요일이면 서초문화원에서 詩를 배우고,

시작한지 20년이 넘어 한국예술문화원 초대작가가 된 서예가이면서도 서예휘호대회만

있으면 쫓아다녔다. 전국 각종 서예 휘호대회에 참가 회수가 무려 100회나 된단다.

情 또한 남달랐다. 

서예 휘호대회에 나가 수상을 하면 받은 상금으로 꼭 맛난 떡을 사들고 와서 나눠먹고,

봄이 가까워지면  우리 모두에게 "立春大吉" "建陽多慶"이라 예쁘게 쓴 한지를 나눠주곤 했다.

그처럼 매사에 열정적이던 그녀는 작년 말에 갑자기 올해 1월부터 3월까지 3개월 동안 수필수업을

쉬겠다고 했다. 마음공부를 하기 위해 오대산 월정사로 100일 출가를 떠난다면서.

그런데 올 초의 첫 수업날에 그녀는 나타났다, 왼팔을 깁스한 채.

왼팔이 부러져 100일 출가를 가지 못했단다. 

한 팔로 살림해야 하는 주부의 어려움 속에서도 그녀는 열심히 글을 썼다.

올 3월 말까지 쓴 글이 거의 100편에 가까웠다.

나는 그녀의 열정을 본받아 거의 매주 글을 썼지만, 70여 편밖에 못 썼는데….

6개월밖에 빠르지 않은 그녀는 거의 100여 편을 썼으니, 당연히 수필반 최고의 다작이었다.

4월이 되면서 그녀는 올 초에 가지 못했던 장기출가를 떠났다.

7월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겼을 때,

우리는 마음공부를 하면서 좋은 글 거리 만들어 오려나 했다.

2015. 7. 7. 화요일, 2/4분기 첫 수업날,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수필공부를 하는 동안 늘 옆자리에서 공부하던 오선생님이 말했다.

"조지은 선생님이랑 며칠 전에 통화할 때는 7월부터 수업에 나오기로 했는데, 안 나왔네…."

그 말에 우리는 "다음 주부터는 나오시겠죠." 했다.

다음 주 화요일(7/14), 지도교수님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조지은 선생이 7월 4일 유명을 달리했단다.

장례까지 다 치루고서야 남편이 연락을 해왔단다.

조지은 선생이 5여 년 전에 유방암 수술을 받았는데, 재발되어 뇌까지 전이 되었단다.

요양차 월정사로 장기출가를 떠났고, 돌아와서 며칠만에 악화되었지만 병원에서도 손을 쓸 수가 없었단다.

우리는 아무도 몰랐다.

그렇게 웃음 많고, 밝고 열정적이던 그녀가 몹쓸 병마와 힘들게 싸우고 있었음을.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허망하게 가다니….

그러고 보니 그녀는 남편과 아들에 대한 글, 친정에 대한 글, 이웃에 대한 글을 많이 쓴 것 같았다.

 

지도교수님께서 '죽기 전에 책을 한 권 내고 싶다.'는 조지은씨의 말을 상기하며 제안을 했다.

"조지은씨의 유고로 수필집을 내자.", "생전에 이루지 못한 소망을 우리가 풀어주자."

지도교수님의 지휘아래 가족을 설득해 남겨 둔 원고를 전해받아 몇몇 회원들이 작품을 선별해 퇴고를 하고….

그 수필집이 마침내 나왔다.

「두고 간 편지」

 

탑처럼 생긴 봉안당

故 조지은씨의 유골함을 바라보며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서리풀 문학회 이규대 회장님의 사회로 추도식 및 수필집 헌정식을 시작했다.

묵념에 이어 지도교수님은 조지은씨가 수필공부에 입문할 때를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일취월장한 글솜씨로 등단도 머지않았는데…, 죽기 전에 책 한 권 내고 싶다던 소원도 이룰 만큼 되었는데….

왜 이리 서둘러 갔느냐며 먼저 간 조지은씨를 원망하면서도, 어느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소중하게 살았던

그녀의 마지막 삶은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하는 삶이라고 했다.

이어 같이 공부했던 장수방 선생이 떠나고나서야 펴낸 수필집을 영전에 바치고,

최선옥 선생이 동료 송영희 수필가가 쓴 추도시를 울먹이며 낭송했다.  

또 故 조지은씨의 작품을 합평할 때마다 글솜씨에 대한 애정을 혹평으로 표현했던 김태겸 수필가가

직접 쓴 추도사를 낭독했지만 한참 동안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혹평을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던

조지은씨의 인품과 수필에 대한 열정을 이야기 할 때는 손수건을 꺼내 연신 눈물을 훔쳤다.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공부하면서 친구처럼 지낸 오숙자 선생이 조지은씨가 쓴

수필의 한 부분을 낭송할 땐 오선생은 물론 가족과 우리 모두가 훌쩍였다.

아내를 떠나보낸 남편은 가슴아픈 이별 이야기를 하고는

아내가 남긴 글을 모아 수필집을 엮은 우리 서리풀 문학회 회원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맏이였던 조지은씨의 남동생과 여동생들은 "우리 언니가 이렇게 열심히 살았네…" 하며 눈물을 흘리고,

어미 잃은 두 아들은 엄마가 생각날 때는 한 장씩 읽어야 겠다며,

훗날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 이 책을 통해 할머니를 만나게 해야겠다며

수필집을 가슴에 꼭 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