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수업을 마치며
2015. 9. 11.(금요일)
지난 5월 22일, 1층에서 5층으로 이사를 했다.
인테리어 공사를 다 끝나기도 전에 이사를 한 탓에 짐정리가 되지 않아 고생은 했지만,
한 동안 무척 여유(?)로웠다. PC설치가 되지 않아 블로그와 글쓰기는 휴업이었다.
덕분에 친구들과 골프여행도 다녀오고, 집안일도 도우고….
평일엔 아침운동을 마치면 동호회에 나가 색소폰 연습을 하다 점심을 먹은 다음
오후 4시가 되면 용산에 있는 어린이집에 가서 은규를 데리고 와서는 같이 맘껏 노는 게 일과였다.
여유를 즐기며 책상서럽을 정리하던 어느날, 그동안 잊고 있었던 카드 한 장이 눈에 띄었다.
작년 9월 퇴직 직전에 고용노동부 고용센터에서 발급받은 것으로 외국어, 컴퓨터 관련,
자동차 정비, 조경, 요리 등등 재취업에 필요한 기술을 배울수 있는 배움카드다.
한도는 2백만원이나 되지만 사용기간이 금년 9월 말까지였으니….
부랴부랴 강남역에 있는 한솔요리 학원을 찾아갔다
그런데 내가 원하던 가정요리는 없었다.
단체급식&출장부페
처녀들이 있고 결혼한 지 석달된 새색시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4,50대의 아주머니들이었다.
14명의 수강생 중 60대는 나 혼자.
남자도 나 혼자.
자기소개를 하는 첫 시간.
선생님이 내게 왜 요리를 배우려하느냐고 물었다.
"40년 동안 따뜻한 밥 차리느라 고생한 집사람이랑 손주들에게 맛난 요리를 해주고 싶어서 배웁니다."
라고 했더니 여성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수업은 월, 수, 금요일 오후 2시 반부터 6시 반까지 4시간씩 20회.
수업 10분 전에 도착해 출석체크를 한 다음 교실에 들어가자 마자 앞치마를 두른다.
냄비에 물을 끓여 식칼과 나무주걱이랑 체를 소독한 다음 20여개 되는 그릇을 깨끗이 씻는다.
쭉∼ 배분해 놓은 식재료를 받아와 미리 다듬고 씻어 놓는다.
선생님이 레시피를 나눠주고 설명을 하면서 먼저 요리 시범을 보인다.
이제는 우리들의 실습 시간.
썰고, 다지고, 데치고, 굽고, 볶고, 레시피를 보며 양념을 계량하고….
이러길 하루 세번, 세 가지의 메뉴가 완성되면 또 설겆이에 청소까지.
잠시 앉을 여유조차 없으니 앞치마를 벗을 때쯤이면 온몸이 나른해진다.
하지만 요리 수업이 있는 날의 저녁이면 우리 집엔 잔치가 열린다.
내가 요리학원에서 만들어 간 세 가지의 요리를 맛보는 작은 잔치.
집사람이랑 딸, 사위들도 잘 먹고, 귀여운 내 손자 원준이랑 은규도 잘 먹는다.
맛나게 잘 먹는 식구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덧 내 피로는 마치 눈이 녹듯이 사라지고.
맛있다며 내게 같이 먹자고 하지만, 나는 학원에서 실컷 먹었다 하고는 다른 반찬에 젓가락을 댄다.
내 어릴 때 귀한 반찬이 있을 때면 어머니가 늘 하셨던 어머니의 말씀을 떠올리며….
'나는 부엌에서 많이 먹었으니 너희들이나 많이 먹어라.'
'너희들 잘 먹는 것만 봐도 내 배가 부르다.'
오곡밥을 짓고 미역국도 끓이고….
콩나물 북어해장국도 끓이고, 김치메밀전병도 만들어 보고….
계란지단을 만들어 무구절판도 만들고, 안동찜닭도 만들고…,
사품냉채에 치킨퀘사디아도 만들고
캘리포니아롤이랑 모듬초회도 만들었다.
지난 금요일 마지막 수업의 메뉴는 너비아나 수삼겉절이와 오징어 파강회.
30여 메뉴의 요리수업이 모두 끝나던 날.
선생님은 한 명 한 명에게 수고 많았다는 말과 함께 수료증을 건네주었다.
드디어 내 차례.
젊은 여자 선생님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어르신 수석졸업 축하해요, 남자 수석…. 못 따라오실 줄 알았는데, 파를 다지고 칼질하는 솜씨는 웬만한
여자들보다 훨씬 낫던데요. 이제 사모님이랑 손자들 한테 맛난 요리 많이 해드리세요."
남자라곤 나밖에 없었으니 남자 수석은 당연지사.
지난 두 달간은 젊은 여성들 속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칼질했던 재미난 시간이었다.
맛난 요리만드는 손맛을 배우기도 했지만,
이보다는 어머니의 마음을 배우고, 가족사랑의 실천을 부엌에서 할 수 있음을 깨달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