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스승의 날

자갈 길. 2015. 5. 17. 11:22

 

 

 

 

2015. 5. 15.금요일 스승의 날.

스승의 날 기념식에 참석한 박근혜 데통령이 중·고교 시절의 은사를 만나 "꿈 같은 시절이었다." 며 학창시절의 추억을 나누는 모습은 오랜만에 보는 훈훈한 TV 뉴스였다. 

스승의 날 유래를 살펴보면 1963년 5월 26일에 청소년적십자 중앙학생협의회(J.R.C.)에서 5월26일을 스승의 날로 정하고 사은행사(謝恩行事)를 했는데, 1965년부 세종대왕 탄신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5월 15일로 변경하여 각급학교 및 교직단체가 주관이 되어 행사를 실시하여왔다. 그 뒤 1973년 정부의 서정쇄신방침에 따라 사은행사를 규제하게 되어 ‘스승의 날’이 폐지되었다. 그러나 1982년 스승을 공경하는 풍토조성을 위하여 다시 부활되었는데, 스승의 날을 세종대왕의 탄신일로 정했다. 그 이유는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측우기 등의 과학 기구를 제작하는 등 백성들의 생활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문화 정책을 펴신 '겨레의 스승'이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취지로 생긴 스승의 날을 하루 앞두고 지방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한 고교생이 자신을 꾸짖는 스승을 폭행하는 일이 있었다는 뉴스와 서울 송파 지역의 한 초등학교는 선물과 꽃다발은 물론 ‘꽃 한송이’도 받지 않는다고 공지했다는 뉴스는 우리를 서글프게 하지만, 어디 이것 뿐이랴.

선생님이 회초리를 들었다고 동영상을 찍어 경찰에 신고하는 경우나, 심지어 자식이 선생님으로부터 매를 맞았다고 학부모가 학교로 달려가 학생들 앞에서 선생님을 폭행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니 교권은 땅에 떨어진지 오래다.

한편 선생님이 학생을 심하께 때려 고막이 찢어졌네, 팔다리가 부러졌네 하는 뉴스는 하루가 멀다하고 메스컴에 오르내린다. 또 스승의 심한 폭행에 제자가 뇌사상태에 빠졌다는 뉴스는 물론 심지어 목숨까지 잃었다는 뉴스도 가끔 보도되고 있으니 학부모의 불안도 전혀 없을 수는 없겠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옛부터 '君師父一體' 라며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의 은혜가 같다고 했던 우리나라가 아닌가.

자식들에게 선생님의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된다고 가르쳤던 우리나라.

학생들은 잘못을 저지르다 들키면 매를 맞는 게 당연하다 여겼고,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고, 고운 놈 매 한대 더 때려준다.'는 말이 있을 만큼 아이들이 빗나가고 있으면 회초리를 들어서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여겼던 우리나라   

내 또래 세대가 공부하던 시절, 특히 소풍가는 날이면 한 병의 사이다와 삶은 계란 몇 개만 있으면 부러울 게 없었던 초등학생 시절엔 선생님은 존경의 대상이 되었던 우리나라인데….

이랬던 우리나라에서 어쩌다 스승에 대한 존경심은 사라지고, 신뢰와 교권은 땅에 떨어졌을까? 

요즘은 왜 이런,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들이 자꾸만 일어나는 걸까?

 

산업화가 한창이던 1973년에 정부의 서정쇄신 방침에 따라 스승의 날이 폐지된 걸 보면서 이런 추론을 해 보았다.

그 시절 내 고향의 부모님들은, 일 년에 한 번 뿐인 스승의 날이 되어도 자식을 맡은 고마운 선생님께 선물이나 촌지봉투는 엄두도 못냈지만 간혹 짚으로 엮은 계란 꾸러미를 들고 오는 아이는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봄에는 복숭아나 찐 감자를 싸서 보내고, 가을이면 갓 삶은 고구마나 빨간 홍시 등 철따라 나오는 먹을거리를 보내면서 정성을 다해 감사를 표했다. 그런데 도회지에서는 달랐던 모양이다. 가진 자들의 적잖은 부인들이 치맛바람을 일으키면서 선생님을 찾아가 자기 자식만을 예뻐해달라며 촌지봉투를 전했던 모양이다. 그러자 촌지에 맛을 들인 일부 스승들은 촌지의 크기에 따라 아이들을 차별 대우했을 것이고, 촌지를 보낸 학부모의 눈에는 돈을 마다하지 않고 덥석덥석 받는 선생님이 교육자로 보이지 않았을 테니 신뢰와 존경심이 우러날 리 만무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면 결국 촌지가 선생님과 학부모, 스승과 제자 간의 신뢰를 무너뜨린 주범이고, 촌지를 받은 스승 스스로가 교권을 추락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셈이다.

또, 옛날에는 대다수의 아이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까지 함께 한 대가족 속에서 5,6남매 중 한 아이로 자랐다 그래서 자연히 윗사람에 대한 공경심이랑 인내심은 물론 형제들이랑 티격태격 싸우면서도 함께 어울려 지내는 걸 터득하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아이들이야, 부족한 것 하나 없이 금이야 옥이야 사랑만 받으며 나 자신만이 최고라 생각하며 자란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이라면 나 아닌 선생님이 어찌 존경스러울까, 나 아닌 스승이 어째서 어려울까.

이런 아이를 낳고 기른 어버이들 또한 결코 그들의 아이들과 다르지 않았으리….

 

그러나 어려운 환경에 있는 제자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참스승도 적지 않다.

그리고 우리는 학창시절은 물론 직장과 사회생활에서도 선생이 필요하고 많은 스승을 만나게 된다.

내게도 잊지 못할 스승 몇 분이 계신다.

초등학교 5학년과 6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이셨는데 오래 전에 돌아가신 분이다.

5학년 때인가, 6학년 때인가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우리 동네에 가설극장이 왔을 때였다. 어느날 밤 동네의 또래 친구 너댓명과 함께 천막 밑으로 몰래 들러간 사실이 선생님께 들통나서 교단 앞으로 불려가 엉덩이가 퉁퉁 붓도록 매를 맞았던 적이 있다. 그렇지만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고 한가지라도 더 가르치려 했는지 그때가 그립다.

또 한 분은 중 3때의 담임선생님이시다. 

어려웠던 가정형편으로 중학교만 졸업하고 학업을 포기하려 했을 때 나를 불러 공부를 계속해야 된다며 직접 상업고교의 원서를 구해와서 써주신 선생님이다. 덕분에 나는 은행에 들어와 40년이 넘도록 정년까지 근무해 지금의 내가 있으니 평생의 은인이다. 또 한 분은 고 2때의 담임이신데, 좋지 않은 추억을 남기신 분이다. 학년 초 장학금 신청 건으로 담임 선생님과 가정형편을 알리는 상담을 하고 며칠 후, 어느날 선생님은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한창 축구를 하고 있던 나를 불렀다. 운동장 한쪽에 서있는 선생님께 달려갔더니 다짜고짜로 내 아구통(?)을 손바닥 밑부분으로 두세 차례 갈겼다.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한낮인데도 눈 앞에 별이 번쩍번쩍했다. 몹시 아프기도 했지만 많은 친구들 쳐다보고 있는 곳이라 얼마나 창피했던지…, 나는 그 이후 그 선생님이 너무너무 싫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표현할 방법도, 어디 하소연 할 곳도 없었다. 반항의 방법이었을까? 나는 공부가 싫어졌다. 아니 학교에 가는 것조차 싫었다.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올라올 때 학년 석차가 600여 명 중 10위 이내였던 내 성적은 3학년으로 올라갈 때는 삼백 수십 등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그때 왜 맞아야 했는지 모르고 있으니….

직장에서도 한창 일을 배울 때는 작은 것 하나하나에 트집을 잡으며 나를 힘들게 했던 선배도 있고, 자상하게 일을 가르쳐 주신 선배도 있다. 그러나 나를 힘들게 한 선 선배는 힘들게 한 대로 배울 게 있었고, 자상한 선배는 자상한 대로 배울 게 많았으니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엔 모두가 잊지지 않는 스승이다.

 

이번 스승의 날을 앞두고 지난 화요일에는 수필창작 수업이 끝나자 나이가 많은 학생이지만 우리들은 작은 정성을 모아 선생님께 감사함을 표했다. 선생님은 한참 동안 받기를 거부하다가 우리도 물러서지 않자 조건을 내 걸었다.

"내가 수업 후 막걸리 파티를 벌릴테니 한 사람이라도 빠진다면 받지 않겠다."

그러고는 먼저 집에 가겠다는 한 회원의 손을 잡아 끌었다.

목요일에는 레슨을 받는 회원들이 모여 색소폰 선생님께 정성을 모아 전했다.

그러자 "나는 선생이 아니라 조교일 뿐이다."며 고사하던 선생님은 조건을 말하고는 음식점에 예약전화를 했다. 

"오늘은 내가 저녁을 살 테니 몽땅 모여 같이 먹는다면…"

나이가 들면 스승의 날마저 이처럼 사제(師弟)간에 허물없이 더 편하게 지낼 수 있는 날이니 얼마나 좋은가.

이 또한 늙어감의 잇점 중 하나임을 깨달으면서, 새로운 '겨레의 스승' 탄생을 소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