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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도심의 보리

자갈 길. 2015. 5. 2. 00:10

도심의 보리

이 석 도

 

   늘 다니는 8차선 강남대로변, 플라타너스 아래에서 가냘픈 보리 한 포기가 솔솔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에도 한들거리고 있었다.

   언제 피었을까?

   볼품없이 자란 보릿대에 수줍은 듯 삐쭉 고개를 내밀 때만 해도 긴가민가했는데, 어느새 이삭 알알이 뾰쪽뽀 쪽 치솟은 까끄래기는 ‘나는 보리요.’ 말하는 듯했다.

   이 한 포기의 보리는 이내 어린 날의 널따란 보리밭이 되어 다가왔다. 넓은 보리밭을 잔디밭인 양 뒹굴기도 하고,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에서 숨바꼭질도 하고, 친구들의 얼굴을 보리깜부기로 까맣게 칠했던 일, 까끄래기 태우는 불에 막 서리한 감자를 구워먹다가 온 입가에 숯검정을 묻히던 시절의 보리밭이 되었다.

   어쩌다. 이렇게 한 포기가, 그것도 서울 강남의 도심 대로변에 돋았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쉴 새 없이 들려오는 차 소리는 또 얼마나 무서웠을까?

   혹시 고향을 잊고 지내는 도시인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어린 시절을 추억하게 하고 싶어 돋아난 건 아닐까?

   한 포기이기에 더 소중하게 보였다.

  잡초조차 잘 자라지 못하는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렸기에 더 대견스러웠다.

  비록 한 포기이지만 열악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끝내 이삭을 피운 모습은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할 삶처럼 보였다. (2014.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