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여행, 여행, 등산...

걸어서 고향까지-열흘째, 마지막 날.

자갈 길. 2014. 10. 17. 23:14

2014. 10. 10. 금요일

걸어서 고향에 가는 도보여행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어젯밤에는 승엽이가 잘 아는 知人이 운영한다는 한우 식육식당에서 한잔했다.

입에 넣자마자 살살 녹는 듯이 맛난 韓牛를 구워 소주를 3병이나 마셨다. 무척 오랜만에 과음했다 싶을 만큼 마신 후 모텔에 들어와서도 여기저기 고향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를 나누느라 늦게 잠이 들었는데도 아침엔 말짱했다.

이젠 고향까지 남은 거리가 30km도 되지 않기에 8시가 다 되어 모텔을 나섰다.

남산면사무소 옆의 한 정자에 앉아 승엽이가 준비해 온 토마토와 치즈로 간단히 요기를 한 다음 길을 걸었다.

자인에서 고향까지 가는 길은, 자주 다녔던 길(비록 차를 탄 채였지만)이라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을 것처럼 익숙한 길이다.

더구나 몇 해 전부터 확장공사를 하고 있더니 아직 정식 개통은 하지 않았지만 대부분 왕복 4차선의 차도에 왕복 2차선의 경운기 길까지 있어 총 6차선인 데다 길 한가운데는 튼튼한 철제의 중앙분리대까지 끝없이 세워져 있어 걷기에는 무척 좋았다.

웬만한 고속도로보다 더 넓게 뻥 뚫린 도로를 보니 속이 시원하고 걷기엔 더없이 좋았다.

그러나, 주중의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 넓은 길에 다니는 차는 별로 없었다. 간간히 다니는 차들을 보고 있자니 이런 시골에 과연 6차로의 넓은 길이 필요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도로를 저렇게 넓히자면 엄청난 세금이 쓰였을 것은 당연하고, 도로변에 있었던 문전옥답들은 또 얼마나 많이 사라졌을까 싶었다.

'그 문전옥답에서 생산되는 농작물이 대단히 많았을 텐데…' 

대로변에 잘 꾸민 전통 찻집이 보이자 승엽이가 앞장서서 들어갔다.

여러 가지 차를 팔기도 했지만 접시와 찻잔, 화병 등 직접 구운 갖가지 그릇을 팔기도 하는 곳이었다.

얼마나 숙성이 잘 되었던지, 십수 차례나 우려내 마셔도 은은한 향을 잃지 않는다는 보이차가 참 좋았던 아침이었다.

 

곧 김전 마을이 나왔다.  

길이 넓어지면서 길가의 집들은 다 헐리고, 안쪽의 마을로만 남아있는 김전을 보면서 잠시 상념에 잠겼다.

'길 옆 저 빈 터는 내 여동생의 시부모님이 살았던 방앗간이었는데….'

'저 골목으로 한참 들어가면, 몇 해 전에 아버지를 따라 묘사에 참석했던, 우리 고성이 씨 문중(門中) 윗대 산소가 있는데….'

그 생각이 들자 3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갑자기 보고 싶었다.

내가 한일은행에 합격했을 때는 마치 고등고시라도 합격한 듯 기뻐하셨지만, 막상 입행할 때 내 신원보증에 필요한 연대보증인 2명을 구하느라 얼마나 애를 많이 쓰셨던가. 그때 우리 시골마을에는 보증인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이 한 분도 없어 각처에 흩어져 있는 부유한 집안 어른을 다 찾아다니며 부탁하셨던 아버지. 아버지는 늘 내게 "한 우물만 파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아버가 살아계시면, 아무 탈없이 40년의 은행 생활을 잘 마치고 정년퇴직을 하는 나를 장하다며, 수고했다며, 고맙다며 꼭 안아주실 텐데….

김전 마을의 입구에는 여러 개의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모두가 뻥 뚫린 도로에 끝없이 세워진 중앙분리대의 철거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넓어진 도로에 쌩쌩 달릴 차를 생각하면 중앙분리대가 반드시 필요할 것 같은데….' '왜, 반대할까?' 싶었다. 그런데 잠시 걷다 보니 주민들의 주장이 이해되었다, 지금까지 별 어려움 없이 도로를 넘나들며 논밭에서 농사를 짓었을 텐데, 느닷없이 도로는 넓혀지고 중앙분리대가 끝없이 세워졌으니, 이제는 길 건너 논밭에 한 번 가려면 횡단보도가 있는 곳까지 수백 미터를 오가야 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더구나 요즘의 농촌에는 젊은이들은 없고 모두가 노인들이니 그 길은 훨씬 더 멀게 느껴지리라 싶었다.

고향 하늘을 머리에 이고 걸었다. 승엽이와 고향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우리 발은 동곡에 들어서고 있었다. 

동곡은 청도군 금천면의 면소재지로, 내 고향 사람들이 닷새마다 찾아가는 장이 동곡장이요. 내 친구 대부분이 다녔고 내 동생도 다녔던 중학교, 고등학교가 있는, 山東에서는 가장 큰 동네다. 우리는 이 동곡에서 추어탕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여기 동곡에서 고향에 가는 길은 두 갈래의 길이 있다. 동곡재를 넘는 8km쯤의 길과 서마리라는 신지 마을을 지나고 매전교 다리를 건너는 10km쯤의 길. 우리는 차를 타고 늘 넘어 다니는 동곡재는 특별히 볼 게 없으니 좀 돌아가더라도 문화재로 지정된 고택과 서원을 둘러보기 위해 신지 마을을 거치는 10km의 길을 택해 걸었다.

먼저 6.25 한국전쟁 때, 전쟁을 피해 우리 고향의 강 동창천변에 몰려든 수십 만의 피란민을 위로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던 이승만 대통령이 하룻밤 머물렀던 만화정과 운강 고택을 둘러보았다. 이곳을 돌아볼 때 '저 쪽 저수지가 있는 곳은 나의 셋째 고모가 시집와 살았던 집이 있었는데…, ' 란 생각과, 방학 때 고모집에 가끔 들렀던 어린 시절에는 이런 고택은 안중에도 없었고 오직 사기공장에서 버린 불량 인형들 중 좀 나은 인형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던 추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와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을 배향하기 위해 세운 선암서원에 들어가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가까이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가 내 고향의 자랑거리인 문화재를 처음 둘러본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창피했다.

매전교 다리를 건너 처진 소나무를 지나  내 고향의 면소재지인 동창에 들어서서는 사십 수년 전 큰 양조장이었던 둘째 고모댁이 있었던 집을 바라보면서 몰래 집어먹곤 했던 양조장의 고소한 고두밥 냄새를 다시 맡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남은 거리는 십 리, 4km.

옛날에 길 양쪽의 포플러나무 가로수가 일품이었던 수백 미터의 도로를 걸었다.

길을 넓히느라 모두 잘라 버린 덕(?)에 뻥 뚫린 도로가 시원스럽긴 하지만 옛날의 길이 훨씬 좋았다 싶었다. 무심교를 지나자 왼쪽엔 동창천 무심지가 유유히 흐르고, 오른쪽엔 높다란 무심암 서있다. 임진왜란 때 전쟁터에 나간 남편을 8년이나 기다렸으나 전쟁이 끝나는데도 돌아오지 않자 절벽 바위에서 강으로 뛰어내려 무심암(無心巖)이란 전설의 바위가 있는 무심지. 어릴 때는 지나다니기를 무서워했던 무심지. 바위 군데군데 고목의 소나무가 자라고 있던 그때의 무심암 바위가 얼마나 멋있었는지 모른다. 이 무심암 또한 길을 넓히면서 바위 아래 부분을 시멘트로 칠갑하고 윗부분은 철망으로 씌워버렸으니…. 옛날이 좋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북지 선돌 곁에 있는 고조부 산소에 들러 인사만 드리고는 다시 걸었다.

마지막 날의 길이 30km 남짓했지만, 고향의 자랑거리를 둘러보면서 고향의 가을을 만끽하고, 구석구석 고향의 내음을 맡느라 10시간이나 걸어 마지막 올막꼬(오르막 고개)에 오르자 저 아래 마을 입구에 우람한 느티나무가 서있는 초등학교가 보였다.

황금빛으로 물든 널따란 들과 함께 커다란 마을이 나타났다.

바로 내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

慶北 淸道郡 梅田面 溫幕里, 明臺였다.

날아가 듯 걸었다.

비록 두 해 전에 폐교되고 말았지만 내 어린 시절의 모든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매전초등학교 교문 앞에 당도하자 하루도 빠지지 않고 걱정 섞인 전화를 하셨던 엄마께서 두 팔을 벌리며 맞아주셨다.  그리고 서울에서 한두 시간 전에 도착했다는 집사람과 딸과 사위, 손자들, 그리고 대구에서 내려온 여동생 내외가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뒤 마을 이장이 다가와서는 매전초등학교 총동창회서 마련했다면서 『걸어서 고향까지』의 완주를 축하한다는 플래카드와 꽃다발을 내게 안겼다.

2014년 10월 10일 16시 10분이었다.

살면서 흉한 일을 겪지 않고 사는 게 잘 사는 것이 福 중에 上福이라고 하던데, 열흘에 걸쳐 360여 km의 차도를 걸어 고향에 오는 동안 작은 흉한 일 하나 당하지 않았음은 물론, 조그만 접촉사고 한번 목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빗방울 한 방울 맞지 않고 완주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어머니를 비롯한 내 가족들과 많은 知人들의 응원과 격려 덕분일 것이니 이 모두가 나의 福이라 생각되었다.

열흘에 걸친 人福, 행복을 만끽한 날이었다.  

 

   ※ 오늘의 경로(30.3km): 자인모텔→남산면→김전→동곡→신지→남양교→동창→고향(걸음수:43,700보)

   ※ 오늘의 경비(0): 0   

 

 

 

 

 

 

 

 

 

 

  (새카맣게 탄 얼굴,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내 모습에 우리 은규가 무서워    

  할까 봐, 할아버지를 몰라볼까 봐 걱정했는데, 금방 내게 덥석 안겨 내 품에   

    푹 파묻히더니 아무한테도 가지 않으려 했다. 보지 못했던 할아버지의 수염이

   신기했던지 살짝 당겨도 보고, 살살 문지르기도 하면서….)                         

 

(완주 후 고향 집에서 승엽이와 막걸리 한잔…)

 

(아버지 산소에 찾아가 인사부터 드리고…)

 

(감 선별기에 올라앉은 은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