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여행, 여행, 등산...

걸어서 고향까지-아흐레째 날

자갈 길. 2014. 10. 16. 11:02

2014.10. 9. 목요일

오늘은 대구를 통과한 날.

대구는 어린 시절, 아니 성년이 되어서까지도 내가 가장 동경했던 도시다. 

나는 대구에 사는 여자들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줄 알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대구의 여자들은 모두가 능금을 많이 먹어서 너무너무 예쁘고 화장실도 가지 않는 줄 알았으니…

 

대구에 살아보는 것이 꿈이었던 시절.

내 고향 청도에서 대구는 100리, 부산은 200리쯤인 까닭에 대부분의 고향 친구들은 대구에 있는 학교로 진학했다.

나도 대구에 있는 중학교로 진학하고 싶었다. 그러나 생활비 등 때문에 부모님은 나를 큰 고모집이 있는 부산으로 보냈다. 

은행에 입행해 연수를 마친 후 근무 희망지를 적어 낼 때 대구로 희망했으나 본점 영업부로 발령을 받았고, 군복무를 마친 후 복직신청을 하면서도 희망 근무지를 또 대구로 적어 냈었는데도 서울 중심지인 서소문지점으로 발령이 났었고, 그 후에도 해마다 한 번씩 하는 인사고충 상담 때마다 대구지역 전출을 희망했으나 번번이 뜻을 이룻 수 없었으니 오죽했으랴.

내가 원할 수록 대문의 빗장은 더 굳게 닫히는 듯해 좌절감을 느낄 때.

1980년대 초 내가 한일은행 역전지점 근무하던 때였다.

그 지점에서 내가 서무계장으로서 모셨던 지점장께서 은행장 비서실장으로 영전하셨다. 얼마 후 비서실로 찾아가서는 대구지점으로 좀 보내주십사 부탁(?)했더니 한 달 만에 대구지점으로 발령이 났는데 그때는 평생의 꿈이 이루어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대구의 배타성은 상상 이상이었다.

은행에서의 텃새도 대단했다. 직원들 간에는 심지어 이런 이야기까지 있었다.

대구 또는 대구 인근 지역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공부를 마친 후 은행에 들어와 대구에서만 근무한 직원은 성골(聖骨), 대구 출신이라도 서울 또는 부산 등 외지에서 근무하다 대구로 돌아오면 진골(眞骨)이라 하면서 거래처 소개를 꺼리곤 했다. 대구 인근인 청도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부산에서 공부했을 뿐 아니라 서울에서 근무했던 나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는 평민이었다.  대구지점 근무가 시작된 지 채 한 해도 지나기 전에 나는 이 꿈이 얼마나 헛된 꿈이었는지, 얼마나 허황된 환상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으니···, 2년 반 정도 근무 후 대구지점을 떠나던 날 다시는, 두 번 다시는 대구에서 근무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이 무슨 얄궂은 인연일까?

1999년에 지점장으로 승진하면서 지점장으로서의 첫 근무지가 대구 서문시장지점이었으니… 

지점장 승진이 그렇게 기쁘다더니만 나는 지점장 승진이 기쁘기만 하지는 않았다. 

결국 이때도…

내가 이토록 대구를 동경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대여섯 살 무렵 고향에서 농사를 짓던 부모님께서 돈벌이를 위해 대구로 이사를 가셨는데 이때 중학교에 입학하는 형과 어린 두 여동생들은 데려고 가셨지만 국민학교 1∽2학년이었던 누나와 국민학교 입학 전이었던 나는 고향집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도록 남겨두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대여섯 살의 어린 마음에 얼마나 엄마랑 아버지와 떨어지는 걸 두려워했을까?

엄마랑 아버지가 있는 대구로 얼마나 가고 싶어 하면서 자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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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천득의 수필『인연』에 있는 구절, '첫사랑은 만나지 말고, 가슴속에만 담아두는 게 좋다.'는 게 떠올랐다.

'대구에 살아 보지 말고, 동경하는 도시로만 남겨둘 걸…' 후회하면서 걸었다.

옛 추억과 상념에 잠겨 대구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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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달교를 건너기 전에 작은 김밥집이 눈에 들어왔다. 김밥 한 줄에 500원이었다

흔히 먹는 일반 김밥과는 달랐다. 일식집에서 나오는 김마끼와 비슷한 맛이었다.

그런데 김밥집 벽면에 붙은 커다란 김밥자랑에 '경북 청도군 화양읍에 김규선 할머니의 60년 손맛을 이어갑니다.'란 글이 있었다.

내 고향 청도의 손맛이 담겨서일까? 김밥은 더 맛있게 느껴졌다. 

팔달교를 건너고 팔달공원을 지나 조금 더 걷자 중앙통에 있는 우리은행 대구지점의 건물이 보였다.

1983년, 나의 대구지역 첫 근무지였던 대구지점이다. 비록 그때의 건물은 헐리고 새로 지어진 건물이지만…

지점 앞에 도착했더니, 나랑 한 마을에서 태어나서 같이 자란 불알친구 승엽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함께 고향까지 걸어가겠다며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춘 모습이었다.

승엽이는 오랜만에 대구를 찾은 나를 데리고 요즘 대구의 자랑거리가 된 진골목이랑 약전골목을 구경시켜 주느라 애를 많이 썼다.

방천시장에도 데려가고, 주말이면 많은 젊은이들이 찾는 곳이라면서 신천변에 있는 김광석 거리에도 데려고 다니면서 안내했다.

옛이야기를 나누며 담티고개를 넘어 시지에 도착했을 때였다. 저만치 앞쪽에서 한 여자분이 손을 흔들었다.

내 고향집의 담 넘어 바로 앞집이 친정인 국민학교 동기동창인 정규였다. 승엽이의 전화를 받고는 기다리고 있었단다.

나의 [걸어서 고향까지] 도보여행에 놀라워하더니 나와 승엽이를 한식집으로 데리고 가서는 맛난 점심에 옛 추억이 철철 넘치도록 따른 막걸리로 하루 반나절밖에 남지 않은 도보여행의 완주를 미리 축하하면서 응원했다. 경산시에 있는 영남대학교를 지나, 무덤에서 출토된 부장물로 볼 때 신라 또는 고려시대의 무장(武將)으로 추정된다는 韓장군의 묘를 돌아보고 경산시 자인에 도착했다.

고향에 오갈 때마다 지나다니는 경산시 자인면.
그때마다 집사람에게 "저기서 하룻밤 자고 갈까?" 농담하면서 가리키곤 했던 그 모텔에 여장을 풀었다.

[걸어서 고향까지]의 마지막 밤을 위해….

고향 친구와 함께….

 

몸을 씻고 나오자 핸드폰이 울렸다.

꼭 이 시간이면 어김없이 울리는 핸드폰,

역시 어머니였다.

내가 도보여행을 시작한 10월 1일부터 어머니는 하루도 빠짐없이 꼭 이 시간이면 꼭 전화를 걸어서는 이렇게 걱정을 하셨다.

"여관에 들어갔나?"

"밥 먹었나?"

"많이 힘들었제, 푹 쉬어라"

엄마의 말씀은 오늘도 전혀 다르지 않았다.

오늘은 내가 더 많은 말을 했다.

"엄마! 오늘부터 대구에 사는 엽이랑 같이 걷고 있으니 아무 걱정 마세요. 집사람이 그러던데 엄마가 곰국을 끓이고, 도토리묵에 메밀묵까지 만드신다고 하던데 힘들게 뭐 하러 그런 걸 다 하세요. 금방 서울로 올라가는데…." 

그러자 어머니는 더 큰소리로 말했다.

"야야, 내 아들이 그 먼 길을 걸어서 온다는데, 내가 뭘 못해 주겠나? 이게 뭐 그리 힘들다꼬…."

한 갑자가 흘러 환갑의 나이가 되었건만, 팔순 중반의 어머니에게 나는 여전히 어린아이였다.  

 

   ※ 오늘의 경로(37km): 잉카모텔→팔달교→팔달공원→우리은행 대구지점→대구시내→김광석거리→시지→영남대학교

                                   →한장군묘→자인모텔 (걸음 수: 60,796보←가장 많았던 걸음수)

   ※ 오늘의 경비(86,000원): 김밥 1,000원, 저녁 60,000원, 모텔 25,000원  

 

 

 

 마중 나온 고향친구 이승엽과 우리은행 대구지점 앞에서

 

 

 고향친구 정규가 맛난 점심으로 응원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