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시아 꽃내음
2013.7.9
오늘은 기대했었는데...
오늘의 작품에도 3곳의 문장은 삭제하는 게
더 깔끔하다는 서평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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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아 꽃내음
이 석 도
(⑧ 초고, 2013.6.11, 퇴고, 2013.7.9)
어디를 가나 꿀 냄새 진동하던 5월은 ‘아카시아의 달’ 이었다.
북 아메리카가 고향인 아카시아 나무의 본래 이름은 ‘아카시’이라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오랫동안 ‘아카시아’로 불러져서 그런지 ‘아카시’보다 ‘아카시아’가 훨씬 잘 어울리는 나무이다.
아카시아 나무는 가시가 많이 달리기도 했지만, 주로 땔감으로 쓰였던 걸 보면 목재로서의 값어치는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벌꿀의 70∼80%가 아카시아 꽃에서 생산된다. 냄새까지 좋아 인기가 아주 높은 꿀이라고 하니 아카시아 나무는 꿀벌을 키우는 양봉업자에게는 숫제 보물이다.
어릴 적, 아카시아 잎은 놀이의 기구였고, 때로는 풀피리였었다.
살짝 씹는 아카시아 꽃의 암술은 꿀이었다.
아카시아는 강한 번식력과 잘 엉키는 뿌리 덕분에 절개지와 비탈진 곳에 심어져 흘러내리는 토사를 막고 산사태를 예방하는 고마운 나무였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의 소나무를 죽이기 위해 심었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왕성한 번식력과 멀리까지 뻗고 엉키는 뿌리가 산림을 황폐화시킨다며 모두 뽑아버리자는 국민운동이 있었고, 실제로 많은 아카시아 나무가 잘렸었다.
서울에도 많은 아카시아 나무들이 있다. 내가 자주 지나다녔던 우면산과 이태원 미군부대에도 많이 있고, 요즘 출퇴근하느라 지나다니는 동작동 국립 현충원 언덕에도 많은 아카시아 나무들이 있다. 해마다 봄이 끝날 무렵 차를 타고 그곳을 지나다니면 코가 가장 먼저 아카시아 꽃이 피었다고 알려주었다,
그런데 한두 해 전부터는 눈이 더 빨랐다. 올해도 하루 두 번씩 버스를 타고 현충원 앞을 지나다니면서도 흐드러지게 핀 아카시아 꽃이 눈에 보이기 전까지는 아카시아 꽃이 피었다는 걸 몰랐다.
해마다 차창을 통해 맡았던 아카시아 꽃의 달콤한 향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TV볼륨을 자꾸만 높인다는 집사람의 잔소리가 시작된 지야 몇 년이 되었지만, 이젠 코에도 이상이 생긴 걸까?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여인의 향수 냄새가 여전히 상큼하게 느껴지고, 집사람이 만드는 맛난 음식 냄새에 입속 가득 침이 고이는 걸 보면 내 후각이 아직은 멀쩡한 것 같은데…, 내 후각이 정상이라면 아카시아 꽃이 향내를 잃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생존경쟁이 치열한 운동경기는 물론, 평온한 듯 보이는 사회에서도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특기는 있어야 살아남든지 뒤처지지 않는다.
동물이나 식물들도 생존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이상의 특성이나 필요성이 있어야 한다.
아카시아는 꽃향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기에 모조리 뽑힐 위기를 이겨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 땔감으로도 그다지 필요치 않다. 목재로서의 가치도 별로 없으면서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주특기, 향기마저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아카시아를 모두 뽑아 버리자.’는 국민운동이 또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된다.
양재천에 커다란 아카시아가 하얀 꽃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반가움에 다가갔으나 가까이 가도록 향긋한 꽃내음은 맡아지지 않았다.
꽃 한 송이를 따다 코에 갖다 대어 보았다. 머리까지 아찔하게 하던 예전의 진한 아카시아 향내는 전혀 맡아지지 않았다.
그때 지나가던 아가씨들이 탄성을 올렸다.
“아, 향기 너무 좋다.”
그녀들의 말 한마디에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아카시아 꽃이 향기를 잃은 게 아니라, 내 후각이 약해졌다는 사실을.
그러면서 향기가 없다고 아카시아 나무가 뽑히면 어쩌나 하는 시름은 한결 가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