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미할비의 소원
2021. 8. 31. 화요일
은규 엄마와 아빠 둘 다 야근으로 늦다길래 찬스다 싶었다.
저녁 식사 후 샤워까지 마친 은규를 재울 요량으로 함께 침대에 누웠다.
활짝 열어 놓고 지내던 창문을 닫을 때는 문득 자연만큼 정직한 게 뭐가 있을까 싶었다.
유난했던 열대야와 식을 줄 모르던 폭염은 한풀 꺾인다 싶더니 며칠 전부터 내리는 비에 아예 씻겨 사라졌다.
무렵 영어학원에서 은규를 픽업해 올 때였다. 주룩주룩 비 내리는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던 은규가 “할아버지, 밤 같아요.” 하던 말처럼 세월은 톱니바퀴였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서산까지 한 뼘도 더 남았던 오후 7시의 해님은 흔적마저 거두었고 대로변 빌딩은 사무실마다 전등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또 아파트 앞 근린공원의 짙푸르기만 하던 플라타너스의 잎이 어느덧 제법 누런 색을 띠고 있었으니 모두 이제 곧 제 자리를 떠나겠구나 싶었다.
내 팔을 베고 누워서는 학교에서 있었던 친구들과의 재미난 일이랑 학원에서 공부한 내용을 낱낱이 재잘대던 은규가 조용하다 싶더니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9시도 안 되어 잠든 걸 보면 영어학원에서 두 시간 동안이나 쉼 없이 조잘조잘 이야기하느라 피곤했던 모양이다.
약간은 도톰한 이불로 덮어주자 이불을 껴안으며 살짝 미소 띠는 은규가 얼마나 이쁘던지···
평온한 모습으로 잠자는 은규의 얼굴을 보고만 있어도 하루의 피로가 사라지는 듯했다.
이마에 입맞춤을 한 다음 책상 앞에 앉아 핸드폰으로 뉴스를 검색하기 시작했는데···
뉴스 타이틀 하나가 내 뒤통수를 때렸다.
세상에 이럴 수가···
며칠 전에는 경기도 여주시에서 네 명의 10대 청소년들이 비옷을 입은 60대 할머니에게 담배심부름을 시켰으나 할머니가 이를 거절하자 손을 끌어당기며 "남자 친구는 어디 있냐? 헤어졌냐?" “나랑 여행 가자.” 는 등 온갖 조롱을 하면서 할머니의 머리를 국화꽃으로 때리는 동영상이 공개되어 온 국민들의 공분을 샀는데 오늘 기사는 그 몇 배의 충격이었다.
손자가 친할머니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 사건이었다.
기사를 읽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어제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인 18세와 16세의 형제가 흉기로 77세의 친할머니를 여러 차례 찔러 살해했단다.
장애를 가진 친할아버지의 신고로 이 형제는 체포되고 할머니는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머리와 얼굴, 팔, 등 전신에 부상 정도가 심해 결국 숨을 거두었단다. 집을 나간 뒤 연락을 끊은 아들과 며느리를 대신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손주들이 9세, 7세였던 10여 년 전쯤부터 이 손자 형제를 거두어 키우고 있었단다. 장애가 있는 할아버지보다 몸이 다소 덜 불편한 할머니가 애지중지 돌봤다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세상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마음은 똑같은데···
돌아가신 할머니에게도 손자들이 세상 전부였을 텐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들이 엄마 아빠로 버림을 받았으니 얼마나 불쌍했을까?
사랑하는 손자들이 엄마 아빠 없이 자라고 있는 모습에 얼마나 가슴 아파했을까?
병들고 늙은 몸으로 두 손자를 돌보는 일은 또 얼마나 힘겨웠을까?
할머니는 엄마 아빠 없이 자라는 손자들을 조금이라도 더 바르게 키우고 싶어 잔소리를 하고 늙고 병든 자신의 몸이 힘들어 심부름을 시켰을 텐데 손자 형제는 할머니에게 흉기를 휘둘렀다.
잔소리를 하고 심부름을 시킨다는 이유로···
참극이 일어난 날 그 주택의 옥상에는 흰색 교복 하나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단다.
숨진 할머니가 월요일 등교할 손자를 위해 빨아둔 흰색 교복이 널려 있었다니 가슴이 더 먹먹했다.
손자들의 싱그러운 미소 한 번에 세상 시름 다 잊는 사람이 할아버지고 할머니인데 왜 이런 세상이 되었을까?
문명이 발달하고 사회가 발전하면 더 좋은 세상 될 줄 알았는데···, 손가락 까딱하지 않고도 밥을 짓고 빨래를 할 수 있어 좋은 세상인 줄 알았는데···, 지구 반대편에 있는 친구랑 마치 옆자리에 앉은 듯 얼굴을 보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어 행복한 세상인 줄 알았는데 인륜이 무너지고 도덕이 사라진 세상이 되다니···, 친손자가 친할머니를 살해하다니···.
이럴 바에야 차라리 삼대(三代)가 함께 살면서 오손도손 情을 나누었던 시절로 돌아가는 게 훨씬 좋겠다 싶었다.
비록 배곯을 때와 불편함이 많고, 모든 게 부족해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해야 했었지만 情이 넘치고 인륜과 도덕이 살아 세계인으로부터 '동방예의지국 국민'이란 부러움을 샀던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친할머니를 살해한 손자 형제가 인두겁을 쓴 짐승처럼 여겨졌다. 천하에 몹쓸 놈이라 생각되었다.
그런데···
이 기사에 달린 댓글 하나가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맞다. '조부모는 손자를 위해서라면 제 목숨도 아끼지 않은 사람이지···'
이젠 하늘에서, 옥에 갇힌 손자들이 새 사람으로 풀려나 행복해지길 빌고 있을 할머니의 명복을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