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새똥 맞은 날
새똥 맞은 날
돌담 이석도
오후 2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돌봄 교실에서 손자를 데리고 나와 교문을 나설 때였다. 내 팔뚝에 물방울 하나가 뚝 떨어졌다. 웬 물방울인가 싶어 고개를 치켜들고 하늘을 바라봤다. 맑은 하늘에 시꺼먼 먹구름 몇 조각이 떠다니면서 물방울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여우비였다.
머리에 또 한 방울이 떨어졌다.
"은규야, 호랑이가 장가가나 보다."
손자는 무슨 말인가 싶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호랑이 장가간다는 말은 하늘은 맑고 햇볕이 나는데 비가 내리는 이상한 날씨에 옛사람들이 썼던 농담이야."
손자는 그제야 고개를 끄떡이더니 말했다.
"할아버지, 나는 한 방울도 안 맞았는데…"
"그래? 나는 머리에도 맞고 팔뚝에도 맞았는데 이상하다. 우리 은규는 착해서 빗방울이 피해 가는가 보다."
잠시 후 은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 할아버지, 저도 한 방울 맞았어요."
손자와 손을 꼭 잡고 걸었다. 뜨거운 햇볕을 피해 걸을 요량으로 나무 그늘이 좋은 근린공원에 들어섰다.
어쩌다 한 방울씩 떨어졌지만 매미소리와 새소리가 여전한 걸 보면 많은 비는 오지 않겠다 싶었다.
"팔에 또 한 방울 맞았네."
"저는 머리에 맞았어요."
손자와 나는 몸에 맞는 빗방울을 세면서 걷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내 오른 귀 위쪽 머리에 뭔가 뚝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는 빗방울인 줄 알았다. 하지만 빗방울 치고는 좀 크다 싶어 손으로 귀 위쪽을 더듬었다. 머리카락에 묻어 있던 것이 셔츠 가슴 부분으로 툭 떨어지고 손가락에도 뭔가 잔뜩 묻은 듯해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묽은 오물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머리 위쪽의 느티나무 가지를 올려다보았다. 까치 몇 마리가 까악! 까악! 울고 있었다. 이런! 새똥이었다. 내 손가락에 묻은 새똥을 본 손자는 "우웩! 우웩!" 구역질하는 시늉을 하면서 달아났다.
집에 들어서면서 웃으며 말했다.
"오늘 벼락 맞았다."
그 말에 아래층에 살면서 잠시 올라와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작은딸과 집사람이 눈이 동그레 졌다.
그러자 은규가 말했다.
"할아버지 새똥 맞았어요."
작은딸이 깔깔거리며 말했다.
"아빠, 복권 사세요. 새똥 벼락이 돈 벼락 될지 알아요."
"복권은 무슨 복권…, 대통령 만나는 꿈을 꾸고 산 복권도 꽝이던데 새똥이 뭐라고…"
새똥 묻은 셔츠를 빨고, 샤워를 한 다음 쉬고 있었다.
문득 어릴 적 일들이 떠올랐다. 요즘처럼 더위가 심했던 여름밤이면 고향집 마당 한쪽에서는 쑥향 가득한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마당 한복판에 놓인 평상에 누이들과 함께 누워 밤하늘의 별을 세는 날이면 가끔 별똥별이 떨어졌다. 별똥별이 사라지기 전에 소원을 말하면 그 원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두 눈을 부릅뜬 채 별똥별을 기다리곤 했다. 하지만 막상 별똥별이 떨어질 때마다 "어!…" 한 마디밖에 하지 못해 속상해 죽는 줄 알았었는데, '마른하늘에 벼락이라더니 마른하늘에 새똥이라니…' 소원이라도 말해 볼 걸…
갑자기 궁금증이 동했다.
길을 걷는 도중에 새똥 맞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인터넷에서 검색했다. 재미난 글들이 꽤 있었다.
지구상 새의 수와 지구의 표면적, 사람의 몸 면적 등까지 추정해 계산했다며 새똥 맞을 확률은 1/4,230,000이란다. 1/4,230,000이라면 사백이십삼만 명 중 한 명이라는 말이 아닌가. 아무 데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게 더러운 새똥이라 처음엔 거짓 통계이겠다 싶었다. 하지만 낼모레면 칠순을 맞는 내가 평생 처음 새똥 맞은 걸 생각하니 어쩌면 맞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검색을 하다 보니 새똥을 맞았다는 사람들의 글도 더러 있었다. 그런데 더 재미난 것은 그들 대부분은 새똥 맞은 걸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행운의 징조라며 복권을 샀다고 한다. 새똥 맞는 확률은 로또복권 1등 당첨 확률 1/6,096,454와 2등 당첨 확률 6/6,096,454의 중간쯤 된다면서…
한 시간은 지났을까?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꼬깃꼬깃 접어 손바닥에 숨긴 채 집을 나서는 내 얼굴에서는 겸연쩍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2021. 8. 11. 수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