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갈 길. 2020. 10. 21. 22:40

2020. 10. 23. 금요일

헬스장에서 곧장 찾아간 매헌초등학교 후문 앞은 오늘도 진풍경이었다.

올 들어 지난주까지는 볼 수 없었던 풍경으로 지난 월요일부터 낮 12시 45분 전후만 되면 어김없이 벌어진다.

충분히 백 명은 됨직한 사람들이 여기저기 삼삼오오로 모여서 담소를 나누고 있지만 후문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한다.

바로 우리 동네, 양재 근린공원 안에 있는 매헌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의 하교시간이다.

4교시의 학교 수업과 점심식사까지 마친 1,2학년생들 중 교내의 돌봄 교실에 가는 아이는 돌봄 교실로 보내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은 담임선생님이 후문까지 인솔하는 것이다. 코로나 19로 인해 등교가 전면 금지되었던 기간은 말할 것도 없지만 출석번호를 홀수와 짝수로 나누어 일주일에 한두 번씩 등교했던 지난주까지는 기껏해야 몇십 명의 학부모들이 기다리곤 했던 후문이 월요일부터 장터처럼 북적거린다. 코로나 19의 재확산으로 지난 8월 하순경 다시 시작된 '사회적 거리두기'가 2.5단계에서 1단계로 완화된 덕분이다. 코로나 19 장기화가 초래한 초중고 학생들의 학습결손과 학력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당국에서 학생들의 등교일 수를 늘리면서 특히 심각한 수준으로 조사된 초등 저학년들의 학습부진과 기초학력 격차를 최소화하기 위해 초등 1,2학년생들의 등교는 지난 월요일부터 주 5일로 정상화된 것이다.

잠시 후 술렁이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후문 안쪽에서 한 여선생님이 열 명 남짓 아이들을 인솔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내 두 팔을 치켜들고 뛰어오는 아이, 두 팔 벌려 아이를 얼싸안는 엄마. 달려 나온 아이를 꼭 껴안는 할머니. 이산가족상봉 장면이 따로 없다 싶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한 어린이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는 듯했다.

2분은 지났을까? 

한 남자가 헐레벌떡 달려오자 아이는 선생님께 고개를 까딱이곤 "아빠!" 하면서 빠져나갔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데려갈 엄마, 아빠, 할머니 등 학부모들이 나타날 때까지 아이들을 보호하는 것 같았다.

어떤 어린이는 '아동안전지킴이'란 글자와 '서울경찰청' 이란 글자가 등판에 새겨진 노란 조끼를 입은 할머니가 데려가기도 했었는데 아마도 맞벌이 부모를 둔 아이들의 귀가를 도우는 분들인 듯했다. 연이어 몇 선생님들의 아이들 인수인계(?)가 끝난 다음 마지막쯤 한 여선생님이 여남 명의 아이들들을 인솔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여남 명 속 한 놈이 내 눈에 확 들어왔다.

바로 내 외손자.

매헌초등학교 1학년 ○반 ○번 송은규.

은규는 언제 나를 보았는지 오른손을 번쩍 든 채 환히 웃으며 걸었다.

아침 등굣길에 오늘은 12시 50분이라고, 공원 쪽의 후문이라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하더니 더 반가운 모양이다. 

지난주까지는 은규의 학교 수업 등교일이 수요일과 목요일이었다. 하지만 1학년 돌봄 교실에 다닌 덕분에 매일 등교한 셈이다. 학교 수업 후 곧장 데려오는 수요일을 제외하곤 거의 매일 내가 아침 9시 전후에 등교시켜 오후 2시경 돌봄 교실로 가서 데려왔으니, 정신없는 할아버지가 오늘도 2시쯤 돌봄 교실로 가는 게 아닐까 조금은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세상천지 다른 건 다 가물가물할 수 있어도 손주들에 관한 한 절대 안 잊을 사람이 바로 할비인데···

은규를 데리고 근린공원을 한 바퀴 돈 다음 집에 갈 요량으로 아이들이 많은 놀이터로 향했다.

낙엽이 나뒹구는 느티나무 아래를 걷던 은규가 낙엽이 어쩌고 저쩌고 하더니 내게 말했다.

"할아버지 이런 걸로 詩 한 번 써 봐요."

"詩를 써라고? 어떤 걸로?"

"낙엽과 사람이 북적거리는 근린공원"

"은규가 詩 한 번 써봐. 동시 같은 거 말이야."

"낙엽과 사람이 북적거리는 근린공원, 가을이 감처럼 익어 간다."

"아주 멋진데. 은규가 생각한 詩야?

"사실은 노래 가사도 좀 있어요."

내 손을 꼭 잡은 채 공원을 한 바퀴 도는 내내 은규는 어깨를 들썩이며 "나나나나 나나나 " 흥얼거렸다.

"은규야 그게 무슨 노래야?"

"제가 제일 좋아하는 'BTS의 다이너마이트'인데, 할아버지는 몰라요."

"응, 할아버지는 몰라. 방탄소년단 노래 중에 좋아하는 노래 또 있어?"

그러자 은규는 "세비지 러브"라 대답하더니 또다시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공원을 한 바퀴 돈 후 집에 들어서자마자 은규는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할비, 핸드폰 프리즈"

그러고는 빼앗듯이 내 핸드폰을 가져가더니 고사리 같은 손으로 폰을 다루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은규는 폰을 내밀며 말했다.

"저는 이게 제일 詩 같아요." 

은규의 손가락은 폰의 화면에 뜬 '파란 가을 하늘'이란 동요 악보 중 마지막 소절을 가리키고 있었다.

'가을도 밤처럼 익어가네, 가을도 감처럼 익어가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 읊는다더니 정말 그런 걸까? 

가끔 한 번씩 내가 쓴 詩를 보여주면서 읽게 했더니 초등 1학년인 은규가 詩를 꺼냈다.

나는 은규를 꼭 껴안 채 얼굴로 볼을 문질렀다. 은규는 내 수염이 따갑다며 고개를 돌리느라 바빴지만···

 

가을이 감처럼 익어가는 근린공원

 

학교 후문을 향해 서 있는 학부모들

 

아이들을 기다리는 학부모를 보면서, 또 은규를 기다리는 동안 나 초등시절이 떠올랐다.

초등학교가 내 고향 마을에 있어 내게는 기껏해야 300미터나 될까 한 거리밖에 안 되는 등굣길이었지만

족히 2km가 넘는 비포장 도로를 걸어야 했던 이웃 마을 친구, 장마철엔 아예 건널 수 없을 만큼 많은 물이 흐르는

강 건너 마을의 친구들도 부모의 도움 없이 다녔는데···, 더구나 어른들조차 나무하러 가기에 너무 멀고 험하다 여겼던

'삭고개, 중산'이란 마을에 살았던 친구들은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다니기는커녕 십 리에 가까운 험한 산길의 등굣길을 혼자 또는 한두 명 정도 짝지어 다니면서도 6년 개근상을 탔었는데 요즘 아이들은 너무 과보호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금방 학교에서 채 1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면서도 날마다 은규를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나 자신을 떠올랐다.

하루 종일 있어봐야 몇 번의 시외버스밖에 다니지 않았던 그때의 시골 도로

집 밖을 나서면 차바퀴 구르는 소리에 귀가 멍멍 해지는 지금의 도심.

나무 한 그루, 한 모금의 물, 한 줌의 흙조차 자연 그대로였던 그 시절의 환경

마음 놓고 들이킬 수 없는 공기, 함부로 손에 묻혀서는 안 되는 흙이 지배한 요즘.

밝은 낮에 보이지 않으면 이웃 아이들이랑 놀고 있겠구나 여기고

어두운 밤에 보이지 않으면 친구 집에서 자겠거니 여겼던 그때의 인심은 사라지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대로 무섭고, 아는 사람은 아는 대로 무서운 세상 되었으니

아이들을 제대로 지키려면 어쩔 수 없겠다 싶었다.

 

후문을 나서는 은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