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새해 첫날의 기도

자갈 길. 2020. 1. 2. 01:03

2020. 1. 1. 수요일

평소보다 한 시간쯤이나 늦게 눈을 떴다..

작년의 오늘이라면 올림픽대로와 경인고속도로를 달려 부천에 있는 형님댁에 도착했을 시간이었다.

우리 집은 4∼5년 전부터 양력설을 쇠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 기일이었던 지난 크리스마스날 형님께서 금년부터 다시 음력설을 쇠자고 하셨다. 재작년 봄부터 중국에 있는 중국회사에 근무하고 있는, 후일 언젠가는 제주(祭主)가 되어야 하는 장조카가 하루밖에 쉬지 않는 양력설엔 올 수 없지만, 우리에게 음력설인 음력 1월 1일이 중국에서는 가장 큰 명절 중 하나인 춘절(春節)로 공휴일이 1주일이나 되므로 귀국해서 함께 차례를 모실 수 있다기에 다시 음력설을 쇠기로 했으니…

아래층에 사는 원준네는 어제 아침일찍 1박 2일 일정으로 여행을 떠난데다, 집사람마저 정토회 서초동법당에서 정초법회가 있다며 나가서 그런지 아침부터 마음이 허전했다.

은규는 일어났을까?

벌써 중곡동에 갔을까?

옆집으로 가서는 노크를 한 후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서자 은규가 두 팔을 벌려 반기며 말했다.

"저는 여덟 살 됐는데, 할아버지는 육십칠 살 되었죠?"

"맞아, 은규는 3월이면 초등학교 들어가겠네, 좋겠다."

은규와 한참 놀던 중, 새해 인사 겸 점심 먹으러 중곡동 시댁으로 11시쯤 출발한다는 딸의 얘기를 듣고는 Back home. 

신정 공휴일이라 스포츠센터마저 문을 열지 않았으니 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쇼파에 드러누워서는 폰으로 유튜브를 보면서 빈둥거리고 있었다. 문득 집사람이 정토회에 가면서 하던 말이 생각났다. 날더러 요즘 운동을 너무 많이 하는 것 같다면서 오늘은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말고 푹 쉬라고 했다. 쉬는 것도 심심해지면 마음공부나 하라면서 한마음선원을 세우신 대행스님의 행장 및 법어집인 [한마음 요전]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갔다.

두툼한 [한마음 요전]을 펼쳐들고 '수혜편 고난의 세월'을 두어 장이나 읽었을까, 머리가 엉했다. 

눈으로 문자를 읽고 있지만 내용은 통 머리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다시 쇼파에 누워서는 발바닥을 두드리며 빈둥거리고 있었다.

그때 집사람이 우리 가족 카톡방에 사진 한 장을 올렸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라고 하지만

      무엇이 달라서 새해인가요?

 

      태양이 새로워진 것도 아니고

      지구가 새로워진 것도 아니고

      달님이 새로워진 것도 아니고

      무엇이 새로워서 새해인가요?

 

      어제는 그제 같고

      오늘은 어제 같고

      내일은 오늘과 같다면

      삶이 새로울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새로울 것이 있다면

      오직 마음입니다.

 

어제까지 괴롭다가 오늘 행복하다면

삶이 새롭습니다.

어제까지 얽매이다가 오늘 자유롭다면

새로운 삶입니다.

 

지난해보다는 올해, 어제보다는 오늘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겠다.’

‘과거의 실수나 실패를 후회하지 않고

오늘과 내일의 교훈으로 삼겠다.‘

이렇게 새로운 다짐을 하는 그날이

바로 새해 새날입니다.

 

날마다 새해 새날이 되는 한해가 되길

바랍니다.

                                                      2020년 1월 1일

                                                                                           

                                                     새해 새날에 법륜

 


정토회 법륜스님의 신년 법어인 듯했다.

아차 싶었다.

2020년 첫날부터 빈둥거릴 수는 없다 싶었다.

벌떡 일어나서는 꽁꽁 몸을 싸맨 후 운동화를 신었다.


몇 달만에 찾은 양재천은 한겨울이었다.

아기나무들이랑 씨앗 뿌린 땅을 꽁꽁 싸매고 있었다.

'마음, 마음, 마음…'

폰으로 받은 법륜스님의 신년 법어를 곱씹으며 길을 걸었다.

너그럽지 못한 삶, 베풀기보다 바라기만 했던 지난날의 삶을 뉘우치면서 걸었다.

새해부터는 좀더 부드러운 사람, 조금은 더 배려할 줄아는 사람이 되리라 다짐하며 길을 걸었다.

영동 1교부터 시작해 2교, 3교, 4교, 5교, 6교와 대치교까지 지나고 등용문 다리를 건너 발걸음을 유턴.

칸트의 산책로를 거쳐 끝이 난 2020년 정월 초하루 약10km의 2시간 도보는 새해 기도를 담은 걸음이었다.

내 외손주들,  세은이와 원준 그리고 은규가 올 2020년에는 더 건강하고 더 행복하게 잘 자라기를…

유유히 흐르고 있는 양재천의 강물처럼 새해에는 내 마음이 더 여유롭고 더 부드럽고 행복하기를…

법륜스님의 말씀처럼 우리 가족과 내 주변의 모든 분들이 작년보단 한 뼘이라도 더 행복하기를…

사라진 공정과 정의가 되살아나서 국민들이 조금은 더 편히 잘 사는 대한민국이 되기를…

어려움에 처한 사람, 세상을 등지는 가정이 제발 하나도 없는 2020년이 되기를…



저 왜가리는 이 정도 추위에 웬 호들갑이냐는 듯

양재천에 발을 담근 채 중무장한 나를 빤히 쳐다본다.

 

몇 달 전에는 못 보았는데

아마도 억새밭의 중앙에 새로 조성한 듯

아무튼 산책길이 흙길이라 더 좋았다.




내 등단 수필의 소재이기도 하지만,

겨울에는 논바닥을 이렇게 얼려 어린이 얼음설매장이 되지만 봄에는 아기모 자라는 못자리가 되어

올챙이가 다 자라 개구리 될 때까지 품고, 삐뚤삐뚤 모내기 끝나는 여름부터 황금빛 일렁이는 가을까지는

도시아이들에게 쌀나무의 일생이랑 허수아비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양재천 무논.


그런데 우짜노.

해마다 이맘때면 아이들이 바글바글했는데 오늘은 개미새끼 한 마리 없다.

올겨울 들어 최강의 추위라니 어쩌니 하지만 날씨가 덜 추워 얼음이 제대로 얼지 않아 개장을 못 했단다.

얼음이 제대로 얼지 않아 예정된 강원도 겨울축제들이 줄줄이 연기된다 하더니 여기도

이러다 오래지 않은 장래에 우리나라에서는 아예 눈이랑 얼음을 볼 수 없는 게 아닐까?

한강의 얼음 위로 소달구지, 탱크까지 다닌 추위 속에서도 우리 아버지들께서는

조국의 번영과 가족을 굶기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한강의 기적을 일구었는데…

겨울에는 꽁꽁 얼 만큼 춥고 여름에는 뻘뻘 땀이 흐를 만큼 더운 사계절이 좋은데




겨울이라 그럴까?

물 흐르는 돌계단에 핀 이끼의 연둣빛에 새로움이 느껴진다.


영동 1교로부터 약 5km 거리에 있는 등용문 다리 입구


엄마 왜가리가 아기 왜가리에게 물고기 잡는 요령을 가르치고 있나 보다.  





칸트의 산책길.

이 추위에 무슨 책을 저렇게 보는 걸까?

나도 올 庚子年에는 책을 좀 많이 읽어야 할 텐데…


조금은 추워 보이고

조금은 쓸쓸해 보여 안아주면서

일년 내내 책만 읽고 있는 칸트로부터

책 잘 읽는 氣를 받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