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40년을 自祝하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일어난 지 불과 보름 남짓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여전히 전국에 계엄령이 발효 중일 뿐 아니라 서울시내 곳곳에는 장갑차와 무장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어 살벌하기 그지없었던 1979년 11월 11일 오후 3시.
하지만
서울 한복판 종로 4가.
이곳의 동원예식장에서는 경북 청도 출신 26살의 한 총각과 전남 고흥 출신 24살의 한 처녀가 백년가약(百年佳約)을 맺고 있었다. 고향에서 상경하신 양가 부모님을 비롯한 일가친척들과 친구 등 많은 하객들의 축복 속에서 보무당당하게 입장하는 신랑은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 만면에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뒤이어 웨딩마치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사회자가 낭송하는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가 울려 퍼질 때 두루마기차림의 아버지 손을 꼭 잡고 입장하는 신부는 조금은 긴장한 듯 다소곳하지만 온 얼굴을 감싼 미소는 신랑과 다르지 않았다.
··········
··········
그로부터 40년
2019. 11. 11. 오늘 그때를 추억하면서 꺼내 보는 두툼한 앨범.
너덜너덜해진 겉장은 지금까지의 세월이 결코 짧지 않았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하지만 겉장을 넘기자마자 나타나기 시작하는 빛바랜 사진 속의 얼굴들은 꿈처럼 아득하다. 당시 예식을 올렸던 예식장은 사라진지 오래요. 우리 부부가 ‘아버지 또는 아버님, 어머니 또는 어머님’이라 불렀던 네 분께서 하늘나라로 가신 지는 짧게는 4년, 길게는 몇 십년이나 되었지만, 기념사진 속 일가친척 중 절반 정도는 돌아가신 듯하다.
더구나 기념사진 속 친구들 중에도 적잖은 분들이 벌써 故人이 되었으니···
‘40년’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이 있고
강산이 변한다는 10년 세월이 네 번이나 흐른 시간이니 긴 세월임에 틀림이 없다.
은행 동료직원의 소개로 만났지만 첫눈에 반해 결혼까지 한 집사람과 함께한 40년.
경주에서의 신혼여행을 마친 후 택시로 내 고향으로 가던 중 동곡재에서 낭떠러지로 떨어질 뻔했던 기억, 고향집에서 동네 분들을 모시고 벌였던 잔치의 추억 등도 이제는 까마득한 추억이 되었다. 보증금 120만원으로 종암동의 한 2층집 이층 방 한 칸을 임차해 시작했던 신혼생활이지만 1년 만에 은행에서 직원복지를 위해 시행한 서초동 직원아파트를 분양받았는데다 40년의 은행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정년퇴임을 했으니 이는 나 혼자만의 운이 아니었으리…
그런데…
지난날의 나는 무척 어리석었다.
직장인 은행과 주요 고객만이 최고인줄 알았다.
가족의 소중함을 몰랐다.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몰랐는데 이제야 알았다.
나 하고 싶은 짓 다 하고 나서야…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야…
퇴직을 하고 나서야…
늦기는 했지만 이제라도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았으니 다행이다 싶다.
우리 부부의 허니문베이비인 쌍둥이 딸의 나이가 우리 나이로 사십이 되지 않았던가. 또, 우리 부부를 “아버지 또는 아버님, 어머니 또는 어머님”으로 부르는 가족이 네 명이요. “할아버지, 할머니”로 부르는 외손주가 셋이나 되지 않는가.
오늘 결혼 40주년을 自祝하면서 나는 다짐했다.
가족과 함께하는 행복.
이것이 지금의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지난 40년 동안 제대로 하지 못한 가족사랑을 몇 배씩 갚아야 겠다고…
당시의 청첩장
신랑 신부 일가친척의 기념사진
신랑과 신부의 친구들
내 고향친구들
더케이호텔 뷔페에서 결혼 40주년을 자축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