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제사
꼭 1년전 2011년 12월 24일에는 병중에 계신 아버지와 두 달째 아버지의 병 수발에 전념하고 있는 어머니, 누나를 뵈러 고향에 갔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전복과 싱싱한 해산물을 차에 싣고 두 딸의 부부와 손자 원준이까지 데리고...
그런데 꼭 1년이 지난 이번 12월 24일에 우리부부는 그 길을 다시 달렸다. 대구에 있는 여동생의 집에 들러 조기와 문어 등 여러가지 제물(祭物)을 가득 싣고서...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
힘겹게 전복을 잡수셨던 아버지가 다음날 영영 우리곁을 떠나, 이번 크리스마스는 바로 아버지의 첫 제사날이다. 우리 집안에서는 할아버지를 비롯한 모든 윗대 제사를 부천 형님댁에서 음력으로 지내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 오남매는 아버지 제사만은 어머니가 계시는 동안엔 고향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그것도 양력으로. 크리스마스날이라 기억하기도 좋을 뿐 아니라, 법정공휴일이라 가족들이 모이기 편한데다 음력으로 지낸다면 주로 양력 1월이 되어 날씨가 훨씬 더 추울것 같아 양력으로 정했는데...
내년은 어떨지 모르지만 이번 크리스마스 전후 날씨는 올 겨울 최저기온을 기록할 만큼 유난히 추웠다.
시골에 도착하니 혼자 계신 어머니는 고향 온 자식들이 잠잘 사랑방에 군불을 지펴놓고 산적꼬챙이를 만들고 계셨다. 잇따라 부천 형님 가족들이 도착하면서 생선손질 등 간단한 준비는 시작했지만 대구에 있는 누나와 여동생들이 도착해야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 같았다. 형님이랑 조카와 함께 작은집을 다녀와서는 산적 꼬챙이만 만들어 놓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군불을 얼마나 많이 땠던지 엉덩이가 익을 정도로 바닥이 뜨거운 사랑방에 누워 잠을 청했지만 아버지에 대한 많은 생각으로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 아버지 옆에 누워 아버지의 거친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었던 아버지와의 마지막 밤이 생각이 나고, 밤새 아버지를 괴롭히던 호흡이 아침부터 잦아들더니 정오무렵 아주 편하게 영영 눈 감으신 아버지의 평온한 모습, 병원에 입원해 계시면서도 늘 자식들에게 웃으시던 모습, 작년(2011년) 추석에 서울에 오셨을 때 목욕탕에서 때밀이의 서비스를 받고 시원해 하시던 모습, 작년(2011년) 설날 어머니와 함께 스키장에 모시고 갔을 때 좋아 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해지면서 아버지와 함께 한 오래된 추억까지 떠올랐다.
여섯살때 동네 공동우물에 빠져 머리가 깨진 내게 세발 자전거를 사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고. 우리집에서 양계하던 내 초등학생 시절 학교를 파하면 길다란 철사줄과 대나무 막대기를 들고 닭에게 고아먹일 개구리를 잡으러 들판을 돌아 다녔던 기억이 났다. 또 앙고라 토끼를 키우던 어떤 해에는 앙고라털로 실을 꼬고 옷을 짜던 어머니의 모습도 떠올랐다. 수박농사를 짓던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 원두막에서 수박밭을 지키면서 아버지 몰래 많은 수박을 따 먹었던 기억이 나고,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별다른 장비없이 곡갱이와 삽으로만 고생 고생하시면서 산을 개간해 만든 밭에 뽕나무를 심고 한창 누에를 많이 치시던 모습이 떠오를 땐 상큼한 뽕잎 냄새와 누에의 보드라움이 생각났다. 내가 울산지점장으로 근무하던 때 아버지께서 3년동안 정성껏 키운 수백 평 밭의 도라지를 인터넷을 통해 팔았을 때 좋아하시던 모습이 떠오르고, 우리 아버지표 도라지의 인기가 얼마나 좋았던지 그때가 그리웠다.
언제 잠들었을까?
양복을 곱게 차려 입으신 아버지께서 나를 찾아 오셨다. 눈을 뜨니 새벽 4시가 조금 안된 시간이었다. 돌아가신 후 꿈에서 단 한번도 뵐수 없다가 한 달여 전 엄마가 좀 편찮으실 때 현몽(現夢)해서 엄마걱정을 하시더니 신기하게 첫 기일(忌日)에 또 뵙다니...
꿈속에 뵌 아버지의 모습과 대화를 잊지않으려 애쓰는 예배당 종소리가 들려왔다.
어린 시절에 많이 들어 귀에 익은 종소리였다.
성탄을 알리는 교회의 새벽 종소리를 어렴풋이 들으면서 또 다시 잠이 들었다.
아버지의 땀으로 일궈진 조래(鳥來)골 감밭, 양지바른 곳에 소담스럽게 만들어진 아버지 산소에 갔다. 일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잘 어우러져 노랗게 물든 무성한 잔디가 보기 좋았다. 평생 땀흘리며 가꾸시던 밭, 시골집을 빤히 바라볼 수 있는 양지 바른곳에 잠드신 우리 아버지, '오늘 밤에 어제 꿈속에서 뵌 좋은 모습으로 오셔서 자식들이 처음 마련한 제삿상의 음식을 맛있게 잡수세요.' 마음속으로 읖조리며 절 올리고 돌아오니 대구에서 누나와 여동생 가족들이 도착했다. 곧이어 생선을 찌고 삶고, 전을 부치며 본격적으로 제사준비가 시작되었다. 별 할일없는 남자들은 밤을 모양 좋게 쳐놓고는 갓 부친 맛난 여러가지 전을 안주로 시골 막걸리를 한잔하는 동안 형님은 집안 구석 구석을 돌아보며 손 볼 곳은 고치고, 땔감 나무를 톱질해 가지런히 정리했지만, 집안 어느 한 곳에도 아버지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헛간에는 늘 타시던 자전거가 바퀴와 안장이 다 닳은 채 세워져 있고, 아버지 어께를 짓눌렀을 지게와 리어카는 주인을 잃어서인지 허전해 보였다.
오후 7시가 조금 넘어 이웃에 사시는 작은 아버지와 사촌동생이 오고서야 제삿상이 차려지고, 제사가 시작되지만 아버지의 지방(紙榜)은 낮설기만 했다. 작은 아버지의 축문(祝文) 낭독 등에 이어 종헌(終獻) 때는 어머니께서 술잔을 올리시도록 했다. 아버지 가신지 1년이 되었건만 틈만나면 아버지 산소를 찾는 우리 엄마가 술과 절을 올리시고 돌아설 때 보인 엄마의 빨개진 눈시울이 내 마음을 아리게했다. 제삿상을 물리고 한 방가득 식구들이 모여 제삿나물 비빔밥으로 음복을 나누면서 먼저 떠나신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아버지 냄새가 듬뿍 배어 있는 고향 집에서 크리스마스 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에는 아버지 장례식 때 호상(護喪)을 맡아 애를 많이 쓰신 어른과 생전에 가까이 지내셨던 동네 어르신 몇 분을 아침식사에 모시고 생전의 아버지를 기렸다.
우리 오남매가 뿔뿔이 헤어져야 하는 26일은 또 최저기온이라고 했다. 이렇게 추운날씨에 어머니만을 홀로 두고 고향을 떠나기 싫어서 어머니께 서울에 같이 올라가자고 졸라보았지만 한사코 싫다고 하셨다. 날씨는 좀 춥지만 시골에 있으면 동무가 좋다면서 지내다 힘들면 대구 여동생의 집에 가거나, 대구에서 KTX를 태워주면 서울에 올라 갈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오남매 가족들이 모여들어 왁자지껄하게 아버지의 첫 기일을 보내고는 구름이 흩어지듯 사라지는 자식들을 손 흔들며 보내는 엄마가 무척 외로워 보였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애써 엄마의 눈길을 피하며 씩씩한듯 "엄마! 서울에 빨리 올라오세요."라고 큰소리 치며 시동을 걸었다. 평생 엄마를 사랑하고 오남매의 행복을 바라시던 우리 아버지가 이제는 엄마걱정, 자식걱정 모두 내려 놓으시고 생전의 소원처럼 한 마리 새가 되어 하늘 높히 훨훨 날아 다니면서 우리 오남매가 엄마와 함께 행복하게 잘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 보시길 바라는 원(願)을 세우고 고향을 떠났다.
(아버지 산소)
(제물 준비에 여념없는 우리 엄마)
(축문을 읽으시는 작은 아버지)
(음복을 나누며...큰 양푼을 든 막내)
(아버지가 쓰시던 지게와 농기구들)
(아버지가 쌓아둔 장작들)
(지난 가을 보관한 감을 나눠가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