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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륙산악회의 불암산 산행

자갈 길. 2019. 9. 9. 14:43


2019. 9. 8. 일요일

이륙산악회의 9월 정기산행일

‘링링’이란 예뿐 이름과는 달리 초속 40m를 넘나드는 대단한 강풍을 거느린 태풍이 온 나라를 벌벌 떨게 했던 어제까지만 해도 오늘의 9월 정기산행은 나가리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다행히 태풍이 어제 오후에 서울, 경기지역을 완전히 빠져나갔단다. 게다가 태풍의 진행속도가 너무 빨랐던 탓에 비구름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아 큰 비가 내리지 않았던 덕분에 오늘은 산행에 아무런 지장이 없을 듯했다. 아니 오히려 옅은 구름만 가득해 따가운 가을햇살을 피할 수 있는 최적의 날씨였다. 역시 우리 이륙산악회는 복을 많이 받은 모임이구나 싶었다.

추석명절을 사나흘밖에 남겨두지 않은 주말이라 고향으로 벌초 간 친구들이 적지 않아 오늘은 출석률이 영 신통치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약속시간 9시 30분.

예상보다 많은 친구들이 참석했다.

게다가 산행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친구들의 기호에 맞춘 커피를 넉넉히 준비해 오는 영문다방 김마담이 집안 일로 참석치 못한다기에 오늘은 모닝커피를 마시지 못한 채 산에 오르나 했더니 산악대장, 귀동다방 김마담이 커피를 대령했으니 이런 바지런함을 보면서 나는 재경 이륙산악회의 산악 대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산악대장 김귀동, 초대 산악대장 권봉기, 2대 산악대장 이홍희,

해외 단장 김석진, 계종걸, 박삼수, 이종성, 최동효 그리고 나

이렇게 9명이나 참석했다.

 

오늘 오를 산은, 서울시 노원구 상계동, 중계동과 남양주시 별내면의 경계에 솟은, 높이 508m의 나지막한 바위산으로 큰 바위로 된 봉우리가 스님의 모자를 쓴 부처님을 닮았다는 불암산.

공릉역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원자력병원을 지날 때 나는 40여 년 전의 추억을 더듬고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이 일어난 지 보름 남짓밖에 지나지 않은 11월 11일 결혼한 나의 신혼생활은 전세보증금 120만원의 성북구 종암동에 있는 주택의 2층 방 한 칸이었다. 하지만 결혼직후 내가 근무하던 한일은행에서 후생사업의 일환으로 분양했던 서초동 직원 아파트의 당첨자 중 십여 명이 이직 등의 사유로 자격을 상실한 바람에 추가모집을 했다. 그 추가모집에서 수십대 일의 경쟁율을 뚫고 다행히 내가 당첨된 덕분에 1981년 초에 서초동 아파트로 입주했지만 여기서는 1년만 살고 공릉동으로 이사해 2년 반쯤을 살다 대구로 갔었는데, 그때 살았던 곳이 바로 원자력병원 옆의 한도연립이었다. 그 당시 똑같은 모양의 2층 연립주택이 수십 채나 있었던 대규모의 연립주택 단지였지만, 35,6년 만에 지나면서 보았더니 한도연립 단지가 있었던 곳엔 십수 층의 아파트 단지로 변해 있었다.

눈에 익은 것 하나 없어 아쉬웠다.

하기야,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인 10년의 세 배도 넘게 지났으니…

 

불암산에 들어섰다.

등산 안내도 앞에서 김귀동 산악대장의 코스 설명을 들은 후 오르기 시작한 불암산

길따라 양쪽에 등산로 외 입산을 통제하는 철책이 조금은 어색하게 보였지만 등산길은 잘 조성되어 있었다.

일요일이라 등산객들이 적지 않았지만 그들과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오르는 불암산.

새멱마다 뛰듯 걸었던 산이라 감회가 남달랐다.

몸뚱아리는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마음은 40년 전의 불암산을 걷고 있었다.

적막하다시피 한적한 산길.

오가는 발길에 의해 저절로 만들어졌을 뿐 가공의 흔적이 거의 없는 등산로이다.

새벽마다 나이 서른에 한두 해가 빠지는 한 남자가 양손에 물통을 들고 불암산을 뛰어다니 듯 걷는다.

늑대 같이 잽싼 그의 산중 걸음은 집에 두고 온 여우와 두 토끼가 궁금한 듯 깃털처럼 가볍다.

···················

잠시 쉬어자자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소리에 정신을 가다듬었다. 

순간 양손에 물통을 들고 앞서서 불암산을 오르던 젊은이 사라졌다.

30대를 앞 둔 젊은이가 사라진 그 자리에는 이달 하순이면 지공선사가 될 내가 서 있다.

젊은 날의 내게 기초체력을 두둑이 저축케 해준 불암산.

지금까지 60년을 훨씬 넘는 세월을 지내는 동안 병원에 입원 한 번 하지 않을 만큼 건강한 것은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DNA가 첫 번째 이유이겠지만 불암산의 역할도 적지 않겠다 싶었다.

불암산의 마사토 흙길은 엄마 품속처럼 편안하고 아늑했다.

맨발로 걸으면서 흙을 느끼고 싶었다.

어제 다녀간 역대급 강풍을 동반했던 태풍 링링이 남긴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불암산의 명물 거북바위를 거치고 정상에 오르는 동안 틈틈이 쉴 때는 친구들이 준비해 온 포도, 귤, 토마토 등 간식을 내놓았다. 하지만 산행의 시장함에 즐거움이 더해서 그런지 내놓은 간식마다 게 눈 감추듯 사라길 몇 차례, 마침내 우리의 발길은 해발 508m의 불암산 정상에 닿았다.

기념사진도 한 컷하고

한참 동안 눈을 호강 시킨 다음 하산!

늙는 세월이 빠르듯 등산보다 하산은 빨랐다.

2시간이나 걸리는 등산길도 1시간이면 충분한 하산 길.

상계역의 맛집에서의 멋진 뒤풀이와 생맥주 한잔의 호프에서는 우정이 함박눈처럼 쌓이고 있었다.  

 

참 멋진 산행이었다.

등산과 하산 길의 곳곳에는 어제의 강풍에 수십 년은 자랐을 만큼 굵직한 나무들이 여기저기 쓰러져 곳곳의 등산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하지만 링링이 할퀴어서 떨구었을 솔잎 등 나뭇잎은 양탄자가 되어 우리를 반기고 있었는데, 그 초록 양탄자 위를 걸을 땐 양탄자에서 풍기는 솔향은 얼마나 향긋했는지 모른다. 불암산을 온통 감싼 솔향의 향긋함은 최근 온갖 매스컴을 통해 근 한 달 동안이나 들었던 조국인지 타국인지 하는 자의 의혹에서 풍겨나오던, 생선 썩은 냄새보다 몇 배는 더 고약한 악취까지 말끔히 씻어내는 청정제였다.

아마도 앞으로 한 달 동안은 내 머릿속도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가을하늘처럼 깨끗히고 파랗기만 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즐거웠던 오늘 불암산의 산행에도 한 가지, 딱 한 가지의 아쉬움이 있긴 했다.

김석진 해외 산행 추진단장을 비롯한 우리 이륙산악회원 모두는 하산하면서 시원한 계곡물에 발 담그는 걸 무척 좋아하는데 우리가 오르내린 불암산에는 어디에도 맑은 물 흐르는 계곡이 없어 좀 아쉬웠을 뿐 나머지는 모두 100점 만점에 100점이었으니 이륙산악회 덕분에 나의 오늘은 행복이었다.


륙산악회 파이팅!


원자력 병원 입구 우측인, 40여 년 전 우리 가족이 살았던 한도연립이 쌍전벽해한 듯  삼익아파트를 지나면서 오늘 행선지인 공릉동과 불암산을 두고 집사람과 나누었던 어제 저녁의 대화가 떠올랐다. 내가 새벽마다 양손에 물통을 들고 불암산에 올라 약수를 받아 날랐던 이야기, 세 살배기 쌍둥이 딸들이 감기에 걸리면 돌봐주는 사람이 전혀 없어 한 놈씩 교대로 병원에 데리고 다니느라 힘들었다는 집사람의 이야기, 집사람이 한 미용실 여주인에게 70만원인가 80만원인가를 빌려줬다가 떼이는 바람에 내가 몇 번이나 언성을 높였던 이야기 등의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는, 당시 세 살짜리 쌍둥이를 둔 우리 부부가 경제적으로 별로 궁하지 않았고, 더구나 당시라면 나는 한일은행 압구정동지점에 근무하고 있어 서초동이 훨씬 가깝고 편한데 왜 훨씬 먼 강북의 공릉동으로 이사를 했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없어 집사람에게 물었다.

“여보, 그때 왜 우리가 공릉동으로 이사 갔었지? 이사 갈 이유가 전혀 없었는데…”

그런데 집사람은 기억하고 있었다.

집사람은 그때 서초동으로 놀러온 자신의 고향 친구인 ○○ 엄마가 몇 번이나 솔깃한 재테크를 이야기하더란다.

그 친구는 당시 중앙정보부(현 국정원)에 근무하는 남편, 두 아들이랑 그 단지에 살고 있었는데, 그 친구가 몇 번이나 서초동 아파트를 전세 놓고 공릉동으로 이사와 차액을 잘 활용(?)하면 살림에 큰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가 하도 그럴듯해서 내게 이사를 졸랐었단다. 그래서 또 물었다.

“그럼 그때, 우리는 그 보증금 차액을 어디다 썼을까?”

집사람이 이야기를 시작하자 나는 이내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모두가 내게는 본가 가족이지만 잡사람에겐 시댁 식구인 내 형제들과 관련된 자금이었다. 경제적으로 별 어려움이 없이 지내고 있는 지금의 내 삶이 어쩌면 신혼 때부터 재테크에 관심을 가졌던 집사람의 덕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불암산 입구



김귀동 대장이 등산 안내도에서 위치를 가리키며 오늘 산행 코스를 설명한다

오늘은 원자력병원 쪽에서 시작해 거북바위를 거쳐 정상에 오른 다음 상계역으로 하산하는 코스란다.




전설에 의하면 불암산은 원래 금강산에 있던 산이라고 한다. 어느날 불암산은 조선왕조가 도읍을 전하는데 한양에

남산이 없어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가 남산이 되고 싶어 금강산을 떠나 한양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지금의 불암산 자리에 도착하여 보니 한양에는 이미 또 다른 남산이 들어서서 자리 잡고 있었다.

불암산은 한양의 남산이 될 수 없었기에 금강산으로 되돌아갈 작정으로 뒤 돌아 섰으나 한번 떠난 금강산에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돌아선 채로 그 자리에 머물고, 이 때문에 불암산은 서울을 등지고 있는 형세 라고 한다.

  


40여 년 전 날다시피 뛰어다니곤 했던 엄마 품속 같은 길이라 나는 맨발로 걷기로…







예쁜 이름을 가진 링링이 깔아준 양탄자

등산로마다 엄청 떨어진 나뭇가지와 솔잎에서 풍기는 솔향과 풀내음은

불암산을 가득 채우고 있어 우리는 피로를 느낄 새가 없었다.


불암산의 명물 거북 바위 앞에서 권봉기, 이 종성, 김귀동가 사진을 찍고 있을 때,

사진은 찍고 싶지만 내려오기 싫어한 박삼수는 왼쪽 위에서 스틱을 짚은 채 저렇게 포즈를 취했다.


거북바위의 옆 모습, 정말 거북이를 닮았다.



불암산 정상 바로 아래에는이처럼 배우 최불암의 글이 있었는데 옮겨 적자면


불암산이여!

이름이 너무 커서 어머니도 한번 불러 보지 못한 채

내가 광대의 길에 들어서서 염치없이 사용한

죄스러움의 세월, 영욕의 세월

그 웅장함과 은둔을 감히 모른 채

그 그늘에 몸을 붙여 살아왔습니다.

수천 만대를 거쳐 노원을 알고 지켜온

큰 웅지의 꿈을 넘보아가며

터무니 없이 불암산을 빌려 살았습니다.

용서하십시요.  


이 글의 사연인즉,

2009년 11월 노원구청에서 불암산의 불암과 한자까지 똑같은

국민배우 최불암씨를 명예산주로 위촉하면서 이 글을 받았다고 하네요.   





불암산 정에서 휘날리는 태극기

어제 불었던 링링이란 태풍에 반쪽이 찢겨나가 이처럼 반쪽만 남았겠지만

 태극기의 이 반쪽 모양을 바라보는 내내 나는 해방 후 남북으로 쪼개진 우리 대한민국이

이념, 정치, 청문회 등 최근 숱한 이슈로  東과 西로도 쪼개졌음을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지만

그래도 잘 휘날리고 있음에 조금은 다행이다 싶었다.




산에 오를 때도 숱하게 보았지만 하산길에서도 곳곳에서 적잖이 마주친 강풍에 쓰러진 나무들


오르내리는 동안 목격했던 꽤나 굵은 나무들이 강풍에 쓰러진 이유를 나는 보았다.

역대급으로 불었던 강풍이 첫 번째 이유이겠지만,

하지만 비탈진 곳에는 뿌리째 뽑혀 넘어진 나무들이 뿌리를 통째로 드러낸 채 있었고

쓰러진 대부분의 나무들은 사진처럼 밑둥치 또는 뿌리쪽이 상당부분 썩었거나 병들어 있었는데,

나는 이를 보면서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100년에 가까운 한평생을 살다보면 우리에겐들 왜 태풍 같은 어려움이 없을까만

어제의 역대급 강풍도 뿌리를 제대로 내린 나무,  근간(根幹)에 병이 들지 않은 나무는 쓰러뜨리지 못했음을


이제 하산도 마쳤다.


이륙산악회여 영원하라

화이팅!